(E. M. Bounds, 1835-1913)
"생명을 주는 설교자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이며
그의 심장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목말라 합니다."
에드워드 멕켄드리 바운즈(Edward McKendree Bounds)는 1835년 8월 15일 헤티(Hetty)와 톰 바운즈(Tom Bounds)사이에서 탄생했다. 그의 이름은 서부 지역 감리교 목사인 윌리엄 멕켄드리(William McKendree)의 이름은 본따서 지어졌다. 그는 미주리 지역에 감리교를 정착시키는데 주요한 몫을 한 사람이다. 그는 가난하게 살기로 작정했고 설교에 대한 소명을 받은 이후로는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말을 타고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그는 1835년 3월, 78세에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이 엠 바운즈는 12살이 되었을 때 자기가 자라난 곳에서 신앙 고백을 하고 교회의 성도가 되었다. 그리고 14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다(1849).
1854년 6월 9일, 19세의 생일을 맞이하기 두 달 전에 그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후로 5년동안 여러 사건들을 처리하면서 성공적인 법률가가 되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판사, 검사 그리고 의뢰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바운즈는 비범하고 영향력 있는 법률가였다.
이러한 눈부신 평가를 뒤로하고 1859년 바운즈는 그의 법률 사무소를 문닫았다. 거절할 수 없는 부르심이 그에게 임한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멕켄드리라는 이름을 따라 살고자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 생애를 통해 설교하는 자로, 복음을 증거하는 사역자로 부르시고 계심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성경을 여러 차례 읽었으며 존 웨슬리의 설교집을 탐독했다. 24세 때, 그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의 생애와 존 플레처(John Fletcher)의 생애를 기록한 책이 특별히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때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에 관련된 전기와 자서전을 폭넓게 읽기 시작했다.
1860년대에 노예 제도로 인해 전쟁이 발발했다. 바운즈는 연합군의 군목으로써 활동했다. 전투는 맹렬했다. 어느덧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무덤으로 둘러싸인 주위와 폐허가 된 농가와 땅, 그리고 부상당한 전우들을 바라보면서 그의 진정한 고향은 이 땅이 아님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1876년 9월 바운즈는 에마 엘리자베스 바르네트(Emma Elizabeth Barnett)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10년 후 그의 아내는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이제 다시는 그의 사역을 계속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설교 사역의 길로 부르셨기에 계속 전진해 가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아내의 시신이 남부 앨라배마의 적토에 묻힌 지 1년하고 9개월 후, 이 52세의 늙은 홀아비는 아내의 임종시 맺었던 약속을 지켰다. 1887년 10월 25일 단촐하고 아담한 예배로 바운즈는 죽은 부인의 사촌(22세)과 결혼식을 올렸다.
5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첫 부인과 두 아들을 땅에 묻어야 했던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였다. 이러한 죽음들은 그로 하여금 성경 연구에 더 몰두하게 했고, 더 나은 소망에 대한 확신과 의구심에 대한 답을 찾도록 했다. 이때 바운즈는 천국(1921)이라는 책과 부활(1907)이라는 책을 썼다.
1890년대 초기에 그는 저술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크리스천 정론지의 일을 계속해 나갔다. 그는 남부 지역의 감리교회에 퍼져 가는 자유주의 사상을 막아내고자 했다. 1894년 5월말, 어떠한 원한의 소리도 없이 바운즈는 편집국장과 감독에게 자신은 "스스로 물러날 것"을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현재 교회가 얼마나 멀리 성경의 인도로부터 표류하고 있는지를 알리고자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봉급과 혜택 그리고 미래의 연금까지도 포기했다.
"이제 당신이 교회를 떠났으니 어떻게 우리를 먹여 살리려고 하십니까?"
"여보, 만약 우리가 주의 뜻 안에 있다면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우리를 먹여 주실 것이오."
바운즈는 매일 새벽 4시에 홀로 기도로써 주님을 만나고자 일어났다. 그의 일과는 7시까지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아침 식사를 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몇 편의 설교와 책을 쓰면서, 중간 중간에 쉴 때마다 기도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대개 모든 가족은 그와 더불어 새벽 4시에 찬양하며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기에 바운즈의 믿음은 해를 거듭할수록 굳건해졌다.
그의 생애 중 마지막 10년동안 바운즈는 단지 몇 차례만의 집회를 수락했다. 그러나 설교를 수락할 때마다 간절한 기도를 하지 않은 채 결정한 경우는 전혀 없었다. 나이가 들고 쇠약해졌다는 이유로 설교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매일의 기도에로, 그가 사용하는 용어로 표현하자면 "기도 사업"(Business of Prayerside)에로 부르고 계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호머 핫지(Homer W. Hodge)라는 애틀랜타의 목사로부터 설교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열흘간의 집회였다. 바운즈는 오후 3시에 설교했다. 핫지가 회상하기를 "그는 첫날 적은 회중에게 별 영향력 없이 설교했고, 그 설교의 주제는 기도였습니다." 핫지는 바운즈와 다른 한 분의 설교자와 함께 방을 썼다.
"저는 다음날 새벽 일찍이 한 사람이 침대에서 눈을 비비며 일어나 날이 밝아 오기까지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는 조용히 기도하기를 수 시간 계속하며 저와 저의 무관심 그리고 여러 목회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중보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다음날 오후 3시에 설교했고 같은 주제인 "기도"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이 집회는 핫지와 바운즈 두 사람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젊은 사역자는 46세의 나이로, 전담 사역자로서는 아직 경험이 없는 신참이었다. 바운즈와 함께 한 8년간의 교제는 즐겁게 가르침을 받는 기간이었다. 바운즈는 핫지를 수년 동안 드려 온 기도의 응답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와의 사귐 안에서 즐거워했다.
바운즈는 그에게 당부하기를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참된 기도의 삶을 위한 필수적인 것들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도록 간구하라고 했다. 이러한 필수적인 요소들은 바로 믿음, 신뢰, 소망, 열정, 인내, 좋은 성품, 그리고 행함, 순종, 그리고 분별력이었다. 이것 외에도 바운즈는 핫지에게 성경 말씀을 보다 효과적으로 연구하는 법을 가르쳤고 능력있는 설교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쳤다.
"거듭 정화된 옛날의 진리를 붙잡으시오."
1913년 8월 24일, 핫지 목사는 이미 오리라 예상했던 전보를 받았다.
"바운즈 목사님은 오늘 오후 본향으로 가셨습니다. 장례는 이곳에서 내일 오후에 거행됩니다. - 헤티 바운즈."
바운즈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한 위대한 용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마치 그만이, 모든 사람들이 믿고는 있지만 나타내기를 꺼려했던 것을 과감하게 쓰고 말한 자인 것 같았다. 여러 해 동안 바운즈는 점점 중대 되는 자유주의 사상의 물결에 거슬러 나아가고자 하는 큰 갈등에 처해 있었다. 옛날 웨슬리파로서의 바운즈는 성경은 "성령의 조명하에 기록되었으며... 우리는 절대적인 성경의 영감설을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것과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었다. 바운즈는 그의 예리한 문장 능력으로, 현대주의자들을 격분시켰으나 참된 웨슬리파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받았다.
출처 : 갈보리자료창고
글쓴이 : Robin 원글보기
메모 :
'스크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운명을 바꾸는 기도 (0) | 2011.08.31 |
|---|---|
| [스크랩] 기도로 원수를 밟으라. (0) | 2011.08.31 |
| [스크랩] 칼빈의 성경해석방법/유해신 (0) | 2011.08.31 |
| [스크랩] 하나님께 중심을 맞추는 삶 (0) | 2011.08.29 |
| [스크랩] 2번유형 봉사와 협조자의 여성 막달라마리아 (0) | 2010.06.21 |